4학년 가을이 되면 자소서를 쓸 일이 많아진다. 보통 써놓은 문장을 AI에게 다듬어달라고 할 때가 많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이상하게 자주 보이는 단어가 하나 있다. “핵심”이었다.
“핵심 역량”, “핵심 경험”, “문제의 핵심”, “핵심적인 역할”.
분명 한국어에 있는 단어는 맞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원래부터 이렇게 “핵심”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썼나 싶은 의문이 문득 들었다. 이제는 자소서뿐 아니라 발표자료나 뉴스 기사에서 “핵심”이라는 단어만 봐도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에 이르렀다.
그냥 개발 과정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구조적 설계 파이프라인”으로 바꿔버리고, 사용 방법은 “사용자 경험 흐름”, 문제의 원인은 “구조적 메커니즘”, 여러 단계로 나뉜다는 말은 “다층적 레이어”가 된다. 여기에 “공학적 설계”, “본질적 분석”, “전략적 접근”, “커뮤니케이션 고도화”까지 붙기 시작한다.
대학생이 프로젝트 과제 하나 했다고 적었을 뿐인데 AI를 한 번 거치고 나면 갑자기 실리콘밸리의 천재 개발자로 변신해 있다.
이미 실제로 유명한 현상인데, ChatGPT의 어색한 말투를 풍자할 때 등장하는 대표적인 문장이 “와, 너 정말 핵심을 찔렀어”다. 또한 not just A, but B, functions as, in conclusion 같은 영어식 표현이 한국어 문장에 그대로 직역되는 사례도 흔히 보인다.
보고서에서 자주 보이는 AI 말투
(생각날 때마다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할 예정입니다.)
| 유형 | 자주 나오는 표현 |
|---|---|
| 영어식 대비 구문 | “단순한 A가 아닌 B다”, “A를 넘어 B다” |
| 추상적인 명사 | “핵심”, “구조”, “맥락”, “통찰”, “지점”, “관점” |
| 거창한 명사 조합 | “구조적 설계”, “공학적 설계”, “본질적 분석”, “전략적 접근”, “실행 파이프라인”, “다층적 프레임워크”, “커뮤니케이션 고도화” |
| 영어식 기술어 | “메커니즘”, “워크플로우”, “파이프라인”, “프레임워크” |
| 과도한 의미 부여 | “주요 전환점”, “본질적 변화”, “결정적 계기” |
| 번역체 동사 | “기능한다”, “중요 역할을 한다”, “~에 기반하다” |
| AI식 인과문 | “A의 이러한 특징들은 B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
| 콜론 | “다음과 같습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 em dash | “이 선택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다 — 하나의 전략이다” |
| 마크다운 강조 | “핵심 역량”, “사용자 경험”, “문제 해결 능력” |
특히 “단순한 A가 아닌 B다”와 “A를 넘어 B다”는 정말 눈에 잘 들어온다. 영어의 not just A, but B를 그대로 가져온 느낌이다.
단순한 기능 구현을 넘어, 협업 구조를 설계하고 효율적인 개발 파이프라인을 구축한 경험이었다.
시스템의 이러한 구조적 특징들은, 응답 지연이 발생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말은 된다. 하지만 한국 사람이 평소 이렇게 쓰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 이러한 특징들은 ~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같은 문장은 보고서에서 한두 번 보기 시작하면 금방 AI가 떠오른다.
영어를 한국어처럼 쓰는 문제
AI의 어색한 한국어에는 영어 문장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LLM 학습 데이터에서 영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고, 영어에서는 자연스러운 표현을 한국어에서도 일대일 치환 방식으로 사용하는 일이 흔하다.
functions as는 “기능한다”, plays an important role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insight는 “통찰”, framework는 “프레임워크”, structural은 “구조적”이 된다.
이 경험은 향후 업무 수행의 기반으로 기능했다.
이러한 특징들은 시스템 복잡성이 증가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본질적 분석을 통해 문제의 구조적 메커니즘을 파악했다.
무슨 뜻인지는 전부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어로 직접 글을 쓸 때 자연스럽게 먼저 떠올릴 만한 문장은 아니다.
이 경험이 나중에 일을 할 때도 도움이 됐다.
이러이러한 구조 때문에 시스템이 복잡해졌다.
문제가 어디서 생겼는지 찾아봤다.
보통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콜론과 em dash
콜론(:)도 꽤 눈에 띈다.
주요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를 통해 얻은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서 확인할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어에서도 콜론 자체를 쓰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AI가 만드는 문장에서는 영어식으로 앞에 설명을 예고한 뒤 콜론을 붙이는 형태로 인해 어색함을 유발한다.
em dash는 더 낯설다.
이 경험은 단순한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 협업의 본질적 통찰을 깨닫게 한 출발점이었다.
한국어 보고서에서는 그냥 두 문장으로 나누어 쓰는 쪽이 훨씬 익숙하다. 이전에 내가 콜론을 싹 다 없애달라고 화를 냈더니 GPT가 그 자리를 em dash로 죄다 대체해버리는 바람에 실소가 나온 적도 있었다.
마크다운까지 템플릿이 되었다
AI 말투를 풍자할 때는 내용뿐 아니라 마크다운 문법도 같이 따라다닌다. 대표적인 게 볼드체인데, 한국어에서 특히 재미있는 문제가 하나 있다.
예를 들어 AI가 이런 문장을 만들었다고 해보자.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량은 **“협업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크다운 문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협업 능력”만 굵게 강조하려는 평범한 의도로 보일 것이다. 그런데 마크다운의 볼드체 문법은 ** 앞뒤에 어떤 문자가 붙어 있는지까지 따진다. 닫는 ** 바로 앞에는 따옴표 같은 문장 부호가 있고, 바로 뒤에는 이, 가, 은, 는 같은 한글 조사가 붙는 식의 조합에서는 별표가 볼드체 기호로 인식되지 않고 글에 그대로 노출된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량은 **“협업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 입장에서는 갑자기 문장 한가운데 기호가 튀어나온 이상한 글이 된다.
영어에서는 강조한 단어 뒤에 알파벳이 조사처럼 바로 붙는 문장 구조가 거의 없다. 한국어에서는 단어 뒤에 조사가 붙는 문법이 흔하다. 그래서 영어권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서비스에서는 별 문제 없이 채택되었던 마크다운 규칙이 한국어에서는 눈에 띄는 불편함이 된 셈이다. 원래는 키워드를 강조하려 넣은 기호인데, 렌더링이 깨지면서 어색한 AI 말투의 상징으로까지 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하나만 보여도 신경 쓰인다
AI가 없던 시절이었다면 보고서에 콜론을 많이 쓴다고 해서 별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구조적 설계의 본질적 핵심”이라는 말을 좋아하거나 문장을 피동형으로 쓰는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 특유의 문체로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은 보고서나 PPT에서 이런 특징들 중 하나만 보여도 AI가 먼저 떠오르기 쉽다. 사람이 직접 쓴 글이어도 괜한 오해를 사기 좋다.
필자는 그래서 이런 표현을 최대한 지우는 편을 선호한다. “핵심적”, “구조적”, “본질적” 같은 단어들은 다 빼버려도 문장이 대부분 잘 성립한다. 콜론도 꼭 필요한 곳이 아니면 문장으로 풀어 쓴다. 또 요즘에는 구어체적인 느낌을 살리기 위해 조사를 조금 더 풍부하게 붙이려고도 한다. “-에서”, “-으로”, “-때문에”, “-하면서” 같은 조사를 자연스럽게 살리고, 명사를 여러 개 이어 붙이기보다 평소 말하듯 동사로 풀어 쓴다.
“사용자 피드백 기반 커뮤니케이션 프로세스 고도화 수행”라고 쓰는 대신 “사용자들에게 받은 의견을 참고해서 소통 방식을 개선했다”고 쓰는 식이다.
전자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이상하게 읽고 싶지 않다. 후자 쪽이 우리가 더 읽고 싶은 문장에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